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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불선삼교합일사상

우촌k 2018. 12. 9. 20:55

儒彿仙三敎合一思想과 道敎와의 關係 및 道敎敎團의 社會的 役割



 李 公 薰

016 - 280 -7124

2010. 10. 08

目    次

 

 Ⅰ. 儒彿仙三敎合一思想의 意義

 Ⅱ. 道敎의 意義

    1. 道敎의 定義

    2. 老莊哲學과 道敎

    3. 神仙思想과 道敎

    4. 巫俗信仰과 道敎

 Ⅲ. 仙敎의 意義

    1. 仙敎의 定義

    2. 道敎와 仙敎의 關係

 Ⅳ. 道敎의 展開

    1. 道敎의 發生과 成長

    2. 中國의 道敎와 우리나라의 道敎와의 關係

    3. 우리나라 道敎의 時代的 區分

 Ⅴ. 맺는 말

                                                                       2014. 03. 24





Ⅰ. 儒彿仙 三敎合一 思想의 意義



(1) 흔히 유불선이 어떻고 하는 등으로 `유불선`을 운위할 때에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선교의 세 사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렇게 사용할 때의 유ㆍ불ㆍ선과 `유불선삼교합일사상` 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은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고 선교도 아닌 것으로 바로 도교의 사상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교가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며 선교도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유ㆍ불ㆍ선을 섭렵했다고 한다면 유교와 불교와 선교의 사상을 섭렵했다는 뜻은 될지언정 도교를 섭렵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도교사상을 탐구하는 수 밖에는 없다.

(2) 재미있는 것은 도교가 지니고 있는 사상을 단순하게 도교사상이라고 하면 될 것 같으나 그러나 난점이 깔려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물론 때로는 간단하게 도교사상이라는 말로서 도교가 지니고 있는 사상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게 해서는 유교사상이라는 말이나 불교사상이라는 말과 대응하는 도교사상이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따라서 도교가 지니는 사상을 보다 정확히 지적하기 위해서는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도교는 분명히 도교의 창시자 張道陵이 한말에 창도 당시에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종합하여 그때까지 지상에 존재하지 아니했던 새로운 종교, 즉 도교를 창도한다고 선언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도교의 완성자는 魏晉시대의 寇謙之이나 중요한 것은 도교의 창도 당시에 기존의 삼교를 종합하여 전무한 종교 즉 도교를 창도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도교가 지니고 있는 사상을 단순하게 `도교사상`이라고 부를 때에는 첫째, 도교사상이 유교사상이나 불교사상처럼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며 둘째, `도교사상`과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 서로 별개의 사상체계인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3) 물론 유교가 지닌 사상을 유교사상이라고 단순하게 처리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그 사상들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들이 방대한 것들인가. 그렇지만 이 세상에 유교나 불교가 지닌 방대한 사상들을 한마디로 묶기에 적당한 다른 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표현이 어느 정도는 허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교에 있어서만큼은 그가 지니고 있는 사상을 한마디로 도교사상이라고 표현하는데 심각한 난점이 있으며, 그 점이 도교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고 특색이기도 하며 역으로 도교를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단은 도교를 장도릉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이 세상에 출현했던 여러 사상들 예컨대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그의 기재를 발휘하여 하나로 묶어 새롭게 출현시킨 종교라고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검토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4) 종교라는 개념도 물론 매우 다의적이고 더욱이 현대적 용어이다. 도교가 창도되던 당시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뜻으로 종교라는 용어를 구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보는 종교의 의미로서 그 당시의 유교을 유교로 보거나 불교를 불교로 보거나 도교를 도교로 보거나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교나 불교나 도교의 역사적 배경이나 포용하고 있는 사상이 큰 범위로 볼 때 분명히 서로 구분되어 질 수 있으며 또 종교라고 하는 카테고리에 담겨질 수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교를 종교로 보면서 유교와도 다르고 불교와도 다르고 선교와도 다른 제3의 종교의 출현이었다고 하는 점을 얼마만큼 인정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제3의 종교적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사회적 역할이 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로서 흔히 얘기하는 절대적 신념체계도 아니고 가치종합체계도 아닐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삼교를 종합하여 전무후무한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었다고 그 스스로는 주장하지만 어쩌면 기존 사상의 단순조립이었을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5) 도교만큼은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기존의 종교체계 여럿을 단순조립 해 만들어낸 종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온 종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도교의 사상을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앞에서 말한 데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흔히 얘기하는  合宗敎의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여럿의 기존 종교 중의 핵심되는 것들을 섞어서 거기에 적당히 새로운 해석을 가하여 만들어낸 종교를 유합종교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합종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모순투성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유교는 세계해석에 있어서 자기충족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유교가 해석못할 세계문제가 있을 수 없다. 비록 해석못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후세의 유학자들이 미쳐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유교자체는 이 세계 모두를 능히 포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절대적 신념체계이기 때문이다. 불교 또한 담지 못할 세계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선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나 선교가 있을 필요도 없고 그건 불교나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어떤 종교도

다 마찬가지이다. 모두 자기 충족성을 누릴 뿐이다. 역사적 현실에 있어서 서로 상보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 하고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절대적 신념체계인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합일한다는 것이 모순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교는 이처럼 절대적인 것 세 개를 모아 하나로 합일하고자 시도하였던 종교라고 하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고 할 것이다.(오늘날 종교통합을 부르짓는자들은 모두 이런 논리선상에 있지 않을까 한다.)


(6) 그러나 도교의 신봉자들을 보면 서로 상충되는 사상을 종합한다는 이러한 모순이 조금도 모순으로 여겨지지 않은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너무도 천연스럽게 통합에 몰두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도교는 도대체 어떠한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인가. 절대적인 것 여럿을 모아 하나로 만든다고 하는, 아무리 보아도 모순인 것을 조금도 모순으로 느끼지 않으니 기이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며 비밀은 단순한 데에 있다. 즉 도교의 신봉자들은 유교나 불교나 선교의 사상체계를 결코 절대적 신념체계로 인정하려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란 참으로 위대한 존재로서 이 세상의 어떠한 사상체계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유일절대신념체계`라고 주장하는 것을 세 개가 아니라 열 개라도 묶어 하나로 종합시킬 수 있는 권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장도릉이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모아 도교를 만들 때의 뜻이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7) 또 한편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유교나 불교나 선교가 지니고 있는 소위 절대신념체계를 인정하거나 안하거나 관계없이 또 별 이해도 없이 그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명문 몇 개만 추려내어 모아서 자기의 교리로 삼으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도교의 창도자에게 있어 보다 관심사항이었던 것은 제3의 종교사상을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억눌리고 핍박받는 대중들을 끌어모으는 것이었고 대중들은 어차피 자기가 좋아하는 명문 하나만 있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같은 유교의 신자 가운데에도 그 사회의 소외계층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말 몇마디가 있고 사회개혁만 부르짖으면 쉽게 동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교신자로서 사회적 소외계층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자기가 좋아하는 명문이 담겨있는 도교의 경전을 접하게 되면 개종이라는 부담없이 쉽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인들도 마찬가지이고 선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도교를 창도한 자의 본심은 새로운 종교의 창교보다 새로운 사회를 위한 프로그램 짜기에 보다 근본적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이 창교자의 사후 긴 세월이 흐르면서 교단으로 점차 자리잡아간 데 대하여 도교는 창도 당시에 종교적 결사로 당당하게 성립되어 격렬하게 사회개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사회개혁 차원의 운동에 사상적 기둥이 되어 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었던 것이다.




Ⅱ. 道敎의 意義


1. 道敎의 定義


도교는 그 의미가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느데, 이를 대충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後漢 말 장도릉이 창도했고 이론적 완성은 北魏 시대 구겸지가 완성했으며 현재까지 장씨 문중을 통하여 60여대까지 내려온 종교를 도교라고 한다. 중국 본토에 사대 도관이 있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도사들을 배출해온 종교이다.


(2). 장도릉이 창도했던 도교의 아류로서 도통을 잇지도 못했고 역사적으로 또 지리적으로 단절되어 있을지라도 장도릉이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합일하여 창도한 종교들로서 예컨대 太平道나 天師道나 태평천국란 시대의 洪秀全의 종단이나 또 한국의 동학이나 그 분파들 그리고 일본의 神道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도교임을 표방하지는 않으나 모두 아류들이라고 할 수 있고 도교교단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모두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을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그의 교리의 핵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3). 학문적 분류상의 도교가 그것인데 여기에는 선교와 동일시하는 협의의 도교와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모두 포함하는 광의의 도교로 나누어진다. 선교임을 자처하는 풍류도나 유불의 개입이 두드러지지 않는 단군계열의 종교들이 협의의 도교라고 할 수 있고 모두를 포괄하고 있으면 광의의 도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도교를 광의로 보는 게 옳은가 아니면 협의의 도교까지 포함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는 도교를 어떤 범위까지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논자들간에 일정한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범위의 불일치는 도교를 이해하는데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필자는 광의의 도교를 도교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에 의한다면 협의의 도교를 도교라고 부르는 건 틀렸고 그건 선교라고 불러야 옳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조금 뒤로 미루고 儒와 佛이 제외된 仙 하나의 의미를 먼저 검토해 보고자 한다. 仙은 그 또한 얼마나 방대한 사상인가. 어찌 한마디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는 하지만 `유불선삼교합일사상` 중에 분명 선이라는 용어가 들어가 있고 그 셋이 어울려 또 하나의 거대한 사상체계를 만들어내었다면 우리는 선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지 않으면 않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선을 분석해 보면 세 개의 사상이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1). 신선사상

2). 노장철학

3). 무속신앙

이 그것이다. 이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교 --- 유교  

                     (광의)   -불교

                              -선교(협의의도교) ---신선사상

                                                  -노장철학

                                                  -무속신앙


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의의 도교와 협의의 도교를 구분해야 하며 앞에서 언급한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종교를 도교라고 할 때에는 광의의 도교를 진정한 의미의 도교로 본다는 뜻이다. 그에 따른다면 협의의 도교는 선교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며 이를 도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선교가 도교라는 주장은 유와 불이 배제된 것 즉 협의의 도교를 도교로 보자는 주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老莊哲學과 道敎


道家란 중국의 노자와 장자로서 대표되는 사상을 가진 학파를 말한다. 흔히 `도`라고 할 때에는 두가지 측면에서 사상적 해석을 내릴 수 있으니 儒家에서 말하는 道는 인생이 가야할 바른 길을 설명한 인도, 즉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의미하고 道家에서 말하는 道는 우주의 실상을 도로서 파악하는 형이상학적 철학으로서의 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유가는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삼강오륜의 윤리규범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도라고 하는 인세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도가는 현상계를 이루는 모체로서의 근원을 도라고 표현하여 초세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도가의 설은 노자의 도덕경에 기초를 두었으며 장자가 이를 계승 확대하였다. 도가는 한대까지는 黃老學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중국 상고시대의 黃帝가 靑丘(옛날 우리나라 지역)에서 廣成子라는 선인으로부터 도를 배워 중국 도가의 시조로 일컬어지게 되었고, 춘추시대에 이르러 노자가 이를 철학사상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황노학은 위진시대 이후로는 老莊學이라고 불리워졌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도가는 노장철학가나 그 학파를 뜻하지 도교인을 뜻하지는 않는다. 도교인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을 보면 道士나 道人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직접적으로 道敎人이라고 하면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종교 교단으로서의 도교(중국도교)에 보면 大宗師니 天師니 하는 등의 직책이 보이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직계를 나타내기 위함일 뿐이고 도교의 신앙을 받아드리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도사나 도인으로 통했다. 문제는 도가와 이와 같은 도교인들과 개념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도교인들을 도가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으나 도가는 곧 도교인으로 볼려는 태도를 왕왕 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도교는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종합한 종교다. 노장철학은 선교를 형성하는 세 개의 기반 즉 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신앙 중의 하나의 위치만을 점할 뿐이다. 따라서 도교 속에서의 노장학의 위치는 단순평균적으로 말한다면 1/3의 위치도 점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장학을 연구하는 도가와 도교를 신앙으로 받아드리는 도교인은 범주에 있어 크게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분야

 관심범위

도교인

종교

 유교, 불교, 선교(신선사상, 노장철학, 무속신앙)

도  가

철학

 노장철학


이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노장철학이란 도교의 여러 복합적 사상기반 중 하나의 위치를 점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장도릉이 도교를 창도할 당시에 노자를 太上老君이라고 하여 宗祖로 삼고 자신을 天師라고 하여 敎祖로 삼게 됨으로써 道德經을 저술한 노자의 위치가 뜻밖에도 상승하게 되었을 뿐 도교에 있어서의 노장철학의 비중은 분명 축소되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도교에 흡입되었던 유교와 불교와 선교 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 부분은 물론 선교라고 해야할 것이다. 또 선교 중에 수용되었던 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 중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진 것은 아마도 신선사상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무속 즉 샤머니즘일런지도 모른다. 과연 선교에 수용되었던 세 사상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쉽게 분별하기 어려운 바가 있으며 이 부분은 좀 더 학계의 구명에 맡겨져야 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도교가 이와 같이 동양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사상들을 대부분 수용했던 관계로 그 각각에 대하여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실제적으로 도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다같은 도교인이면서도 어떤 이들은 유교적 가르침을 우선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불교적 진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신선 얘기에 넋을 놓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노장의 무위자연을 설하며 눈을 지긋이 감기도 한다. 무속신앙의 표출 즉 범신을 숭배하며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도 흔히 보는 일이다. 얼핏보면 다 다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도교라고 하는 커다란 범주 속에 포용될 수 있는 자들이고 소위 도판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도교의 내용은 노자의 설에다 신선사상을 근저로 하고 당시에 성했던 음양오행설, 불교의 인과응보, 불상생의 교리를 혼합하고 유교의 권선징악적 윤리설을 종합해 놓았다.

인용에서는 도교가 여러 사상을 종합해 놓았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무속신앙에 대해서는 언급이 미흡한데 필자의 불찰이 아닐까 한다. 무속이야말로 도교의 진수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인데 실제로 도교의 儀式과 무속적 樣態는 서로 방불한 데가 있다. 또 도교의 諸神과 무속적 汎神들도 방불하기는 마찬가지다. 시간상으로 보아 무속은 인류생활의 원초적 형식이 담긴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거대한 자연과 맞서 투쟁하던 시절 공포와 두려움을 심정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때로는 자연을 경배하기도 했고 때로는 위로하기도 하면서 공포와 두려움을 덜어내곤 했다. 심리적 평정을 되찾기 위한 인간의 행동양식 자체가 곧 무속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중 저변에 깔려있는 이러한 意識과 그를 표상하는 行動양식이 후에 발생한 도교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범신의 전통적 무속신앙이 도교의 기반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속신앙과 노장철학과 신선사상 중의 어느 것이 보다 선교를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는 쉽게 가리기 어려우며 어쩌면 그러한 분별이 무의미한 작업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하나의 가치체계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모두를 포괄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분석하려는 자세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세가지 즉 무속신앙과 노장철학과 신선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유교와 불교를 배척하고 선교가 곧 도교라고 하는 주장이 매우 완강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고 따라서 주목할만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神仙思想과 道敎


최삼룡저 `한국문학과 도교사상`에 보면 도교의 성격을 네 가지로 요약해 놓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多神敎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다.

(2). 延命術이라고 볼 수 있으니 長生不死를 이룩한 자를 신선이라고 하여 도교의 가장 이상적인 경지로 생각하였다.

(3). 윤리설

(4). 계율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도교와 신선사상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비록 도교가 여러 사상체계를 종합하였음은 분명하지만 어쩌면 신선사상을 제외한 네 가지 즉 유교나 불교나 노장철학이나 무속은 도교가 이상으로 하는 신선이 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도교의 이상적 경지는 분명 신선이 되는 것에 있고 이를 위하여 유교의 경전 속에 있는 윤리설 중 적당한 부분을 발췌하였고 불교의 가르침 속에서도 수도자의 계율과 관계되는 것을 옮겨왔고 노장철학은 도교인들 즉 도사나 도인들에게 멋진 논리를 제공해 주었으며 무속은 수많은 신들과의 만남의 장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원래 신선사상은 도교가 창도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의 정신세계 속에 자리잡아왔던 중요한 한 사상체계였다.

일찌기 광성자가   山에서 수도하여 도를 개우친 후 이를 알고 황제가 찾아와 도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장자의 `南華經` 在宥편을 보면 `黃帝至  山 見廣成子 問陰符經`이라고 하여 아득한 옛날부터 신선의 존재를 인정하였으며 인간이면서도 신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으로 추앙하여왔다. 또 東方仙派의 宗인 桓因眞人도 광성자의 도맥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신선사상은 그 뿌리가 깊은데 이 사상이 발전되어온 경로를 보면 일부는 신선사상 고유의 독자적인 체계를 유지하여 오고 다른 일부는 소위 선교로 흡수되고 또 다른 일부는 도교형성의 한줄기 역할을 하면서 발전하여 왔다. 이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1기

(노자이전, 

B.C. 6C 이전)

2기

(노자 이후, 장도릉 이전,

B.C. 5C 이후, A.D. 3C 이전

3기

(장도릉 이후,

A.D. 4C 이후)

  신선사상 -------------------- 신선사상 -------------------- 신선사상

  노장철학               선교 ----- 신선사상 ------- 선교 -------- 신선사상

                                     노장철학                           노장철학

  무속신앙                           무속신앙                           무속신앙

                                                         도교 ------- 신성사상

                                                                        노장철학

                                                                        무속신앙

                                                                      유교, 불교


1기란 동양에서 신선사상이나 무위자연사상이나 무속이 태고 이래로 독자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 오던 시기로 노자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노자가 출현했던 시기로 추정되는 BC 6세기 이전까지는 각개의 사상들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사상과 합하여 제3의 무엇을 창출해내지 못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러면 노자 이전에는 신선사상과 무위자연사상과 무속이 어울어진 선교교단이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노자 이전에는 서로의 사상체계가 독자적으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종합으로는 아직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측컨대 선교도 노자 이전에 이미 출현했다고 보야야 할 것 같다. 堯舜 시대부터 政敎未分離 상태의 정치권력이 존재했었고 이런 권력은 곧 종교집단이기도 했으므로 정리된 교리를 지닌 교단의 존재여부를 말할 때 그런 선교교단이 없었다는 말이지 초기 형태의 선교교단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보여진다.

 2기는 노자의 출현이후 신선사상이 한편에서는 독자적인 길을 걷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장철학과 무속신앙과 융섭의 길에 들어선 시기를 말한다. 즉 장도릉이 나와 `유불선삼교합일`이라는 기치아래 도교라고 하는 역사상 전무했던 새로운 제3의 종교를 창교하기 이전까지를 말하며 역사적으로는 소위 춘추전국 진한 시대에 해당한다. 이 때에 그 동안 독자적인 길을 걷던 신선사상가들 중 일부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은둔의 길을 걸었으나 노자의 철학적 도를 접한 신선사상가들 가운데는 이를 포용하려는 자들도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여기에 샤머니즘이 덧붙여져 사상의 융합을 이루고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으니 그것이 선교다. 선교는 신선사상의 바탕에 노장철학으로 기둥을 삼고 무속으로 지붕을 올렸다.

 동양의 토양 위에서 잡다하게 생겨났던 여러 사상들이 큰 갈래로 나누어 볼 때 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신앙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이것들이 그 시기에 서로 만나 영향을 주고 받다가 마침내 선교로 합일하게 된 것이다. 합일을 거부하고 독자의 길을 걷는 부류들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이 세 개의 사상이 합하여 선교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매우 취약하게 존재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선교라고 하는 교단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선교라는 말이 학술적 용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선교교단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잇다. 즉 신선사상이나 무속신앙이나 노장철학이 한없이 다기하게 세분될 수 있는 사상들이며 살아 숨쉬는 것들이며 개념규정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인위적으로 묶어 거칠게 신선사상이다 혹은 노장철학이다 혹은 무속이라고 이름짓는 것조차 무리가 따름은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사상의 갈래를 대충이나마 묶어보면서 동양정신의 이합집산을 개관해 보는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선교는 어떤 존재성을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기는 역사적으로 보면 매우 짧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교가 독자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하기보다는 유교나 불교라고 하는 보다 튼튼한 논리를 갖춘 교단과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가운데 그들의 사상을 흡인하여 보다 다양성을 갖춘 사상체계로 탈바꿈시키려는 선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하던 자들 중 가장 크게 성공한 후한말 장도릉이 출현함과 동시에

역사의 무대 뒷전으로 물러난다.

 3기는 장도릉이 鵲鳴山에서 도를 깨우쳐 구세제민의 기치 아래 천사도를 표방하고 나선 이후를 말한다. 장도릉이 내건 이름은 원래 천사도였으나 북위의 구겸지가 그 사상을 종합하면서 노자를 종조로 장도릉을 교조로 삼았기 때문에 도교의 창도자는 장도릉으로 본다. 장도릉과 관계되는 인맥은 다음과 같다.


 황제 - 노자(도덕경을 지음) - 장자 (남화경을 지음) - 간질 장각(태평도, 황건적의 난은 장각이 중심. 그러나 그 전에 간길이 있었음) - 장도릉(五斗米道 뒤에 천사도로 바뀌고 다시 正一敎로 개칭함. 유불선삼교를 합일하였다고 선언함) - 魏伯陽(參同契를 지음. 천지의 氣를 체내에 섭취하는 胎息法을 논함.) - 葛洪(包朴子를 지음. 신선사상을 정리함.) - 구겸지(신천사도. AD423년. 성립도교의 완성자.)


 이 3기는 독자적인 신선사상, 독자적인 노장철학, 독자적인 무속신앙의 일군이 있고, 이 3개의 사상이 혼융된 선교교단이 있고 그 위에 유ㆍ불이 가미된 도교교단도 있다. 오늘의 토속종교에서 수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삼자의 관계를 잘 구분해서 볼 수만 있다면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는 동양에서 발생하고 발전해온 수많은 종교와 사상들을 쉽게 가름할 수 있을 것이고 동양사상의 淵源에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소위 학자들이 말하는 成立道敎를 그 전단계의 선교나 그 보다도 더 이전단계인 독자적 사상체계로서의 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신앙과 혼동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게 될 것이며 이 삼자간의 상호제약관계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巫俗信仰과 道敎


인류학적으로 볼 때 동양 특히 북만주 지방에서는 일찌기 샤머니즘이 발달했었다고 한다.

 샤머니즘이란 만물 속에 정령이 깃들여져 있고 이러한 정령이 인간과 세계를 주재하고 있다는 애니미즘 즉 物活論의 관념하에 여러 가지 독특한 의식과 금기를 가지고 생활의 일부분으로 토속화시킨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독특한 의식이란 예컨대 무당의 굿과 같은 것으로 인간과 정령이 깃들여진 자연이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어떤 순간에 맛봄으로서 자아도 잊고 대상의 공포도 잊어버리는 신비체험을 주요 요소로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샤머니즘은 한편으로는 독자적으로 연면히 흘러 내려와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나 도교 속으로 흘러들어가 종교의식의 일부가 되기도 한 것이다.


하나의 종교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儀式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인데 도교에 있어서의 의식을 형성시켜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샤머니즘 즉 巫俗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신선사상이나 노장철학이 사상적 기반과 줄기를 이룬데 대하여 무속은 의식적 기초를 이루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신선사상이나 노장철학이 內面的 意識的 條件을 만들어 주었다면 무속은 外面的 行動的 樣態를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내면의 의식이 행동을 이루어내는지 아니면 행동이 내면적 의식을 제약하는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도교와 선교에 있어서만큼은 그것을 구별할 의미가 없을 만큼 서로가 어루러져 하나의 역사적 실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Ⅲ. 仙敎의 意義


1. 仙敎의 定義


(1). 도교의 개념정의가 어렵고 그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도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교도 개념을 정의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더우기 선교는 도교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개념 규정하기가 더욱 어렵지 않은가 한다.


흔히 도교를 중국의 민간종교라고 쉽게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교는 그렇게 말해질 수도 없고 또 선교라는 교단을 지적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종교라고 하기에는 적당하지 아니하나 그렇다고 부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아마도 선교를 하나의 명칭으로서라도 다루어야할 이유는 `유불선`이라는 용어가 존재하고 있고 따라서 유나 불과 대등한 또 하나의 무엇으로서 선이라는 것이 있다고 여겨지는 데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유나 불처럼 선도 하나의 가치종합체계로서 기능하는 유와 불과 동격의 사상체계라고 보는 것은 선에 대한 바른 견해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어쩌면 유도 아니고 불도 아닌 기타의 것으로 동양에서 발생한 자생적 사상들 중 중요한 몇 가지를 대표하는 용어가 아닐까 한다. 그것이 신선사상이고 노장철학이고 무속이다. 물론 신선사상도 여러 사상체계를 종합한 것이고 노장은 말할 것도 없으며 무속 또한 마찬가지로 종합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도 언어상으로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위에 다시 이 셋을 대표하는 용어로 `선`이라고 하는 어휘를 사용하는 게 얼마만큼 무리가 따를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선을 나름대로 정의하지 않고 피해갈 길은 더욱 없어 보인다.


(2). 선교의 개념정의가 어려운 관계로 필자는 사실상의 문제로 환원하여 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을 합하여 종교로 향하였으되 유교와 불교를 수용하지 아니한 그러한 교파가 있다면 이를 선교로 보고자 한다. 따라서 도교의 사상을 도교사상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하는 입장에서 선교의 사상은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은 분명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이 합쳐진 것을 단순히 선교사상이라고 하여 담고 있는 내용이 호도되는 것도 피하기 위하여 `신선노장무속합일사상`이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길고 어색하다면 하는 수 없이 선교사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만 선교사상이 무엇인가를

유합한 사상임은 분명한 일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난랑비서에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이라고 하여 풍류도가 있고 그것이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 삼교가 유ㆍ불ㆍ선 삼교를 뜻한다고 한다면 이 풍류도는 유교, 불교, 선교 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는 풍류도가 바로 도교라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필자의 논리대로라면 선교(신선노장무속합일사상)=도교의 전단계(유와 불이 제외된 것)라고 할 수 있으므로 풍류도는 선교가 아닌 도교이다. 그러나 도교=선교라고 보는 어휘의 혼란 때문에 풍류도=선교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3). 선교는 한편으로는 도교로 발전되기 전단계로서 후에 유와 불을 흡수하여 도교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ㆍ불을 배제한 채로 선교 자존의 길을 걷기도 하였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자존의 길이란 대단히 취약한 형태로 역사 속에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는 이내 도교 속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아니면 신선사상 본연의 길이나 노장철학 혹은 무속으로 분열되어 제 갈길을 갔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종합의 길인 도교화나 분열의 길인 각자의 사상(신선사상, 노장철학, 무속신앙)으로 환원하려는 원심력이 작용하는 틈바구니에서 독자성을 지키기가 어려웠고 결국 영속적으로 종교 집단화하는데 실패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종합하기로 하면 유와 불도 종합해야 하고 종합하지 않기로 하면 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신앙을 종합하는 것마져도 너무 많은 종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신선사상이면 신선사상 하나만 가지고도 궁극의 경지에 이르면 노장철학과 무속신앙은 물론 유와 불도 모두 통할 수 있는데 특별히 분별하여 종합할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는 노장가들도 마찬가지이고 무속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이다.

 결국 선교는 종교집단적 측면에서 볼 때 형성도중의 종교이거나 와해도중의 종교 즉 `途上의 宗敎`라고 할 수 있다.


(4). 선교는 `未完의 宗敎`다. 종교가 인간영혼의 구원에 궁극적 목적이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미완이라는 것은 아니고 사회적 실체를 갖추고 어느 정도 영속성도 지니며 독자적인 신념체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미완이라는 뜻이다. 종교적 요건을 다 갖춘 도교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의미에서도 그렇고 신선사상이나 노장철학이나 무속신앙으로 퇴영하려는 속성이 있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그렇기는 하지만 동양의 종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종합에의 길로 나아갈려는 속성이 보다 강하고 그런 종합과정의 중간단계에 출현하는 종교는 선교이거나 선교와 유사성을 띠우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동양사상, 특히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고래로 민중 속에 스며들고 발전하여왔던 사상이 크게 보아 신선사상이고 노장의 무위자연사상이고 무속신앙이었지 이에서 크게 벗어난 다른 무엇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교는 경세의 원리로서 그리고 治者의 被治者에 대한 윤리적 당위로서 요구되어 온 것이지 종교성은 희박한 것이었으며 불교는 이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자생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생적인 여러 사상들이 종교교리로 화하게 되는 과정에서 중간 단계를 거쳐야 한다면 이러한 중간과정에 놓여있는 종교가 선교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간과정 속의 미완의 종교인 선교를 형성하는데 있어 신선사상이나 노장철학이나 무속신앙 중 어느 것이 보다 큰 영향을 발휘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선교에 흡수된 여러 사상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도교 - 유교  

     - 불교

     - 선교 - 신선사상 - 養生術 - 調息 (深呼吸, 腹息呼吸, 玉泉, 叩齒, 導引)

                                   服藥 (丹沙, 黃芩, 雲母, 雄黃, 石瑩, 伏芬,

                                         地黃, 麥門冬, 黃蓮, 拘杞子 等)

                                     穀

                                   房中術

                           尸解(羽化登仙)

                           十長生

              노장철학 - 無爲自然

                         無明思想

                         無我思想

                         自然主義哲學

              무속신앙 - 玉皇上帝    西王母

                         原始天尊    仙桃聖母

                         太上老君    太乙眞君

                         檀君        三皇

                         陰陽五行說  風水地理說

                         日月星晨說

                         굿,醮,祭     招魂

                         占術        讖緯(일식 월식 지진 등을 보고 길흉화복을예언함)




이상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드시 선교 속에는 수많은 사상들이 흘러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도표는 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신앙을 명쾌하게 분류시켜 놓은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가 내부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내용을 채워왔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간에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선사상가(=신선술가)와 노장가(=도가)와 무속인(=무격)들은 한편에서는 선교에 흡수되어 말하자면 선교인이 되기도 하고 선교에의 흡수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신선술가나 노장가나 巫覡으로 남기도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다.


2. 道敎와 仙敎의 關係


 도교는 선교인가. 아니면 별개인가. 그리고 별개가 아니라면 서로 어떤 관계인가 하는 의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교와 선교에 대한 개념이 규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하여 학계는 학계대로 도교에 관심있는 이는 그들대로 사용하는 의미가 다르고 또 산만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 혼란의 도가 심한 상태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된 근본이유는 생각컨대 첫째, 도니 선이니 하는 용어들이 지극히 주관적인 어휘들이어서 다수인에게 객관적이며 타당성 있게 설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 이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규명할려는 시도가 미흡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도니 선이니 하는 어휘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상체계가 적어도 동양삼국에 있어서는 태고 이래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음에 비추어 이제는 그러한 사상체계가 규며되어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먼저 道敎에 대한 학자들의 定義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후 仙敎에 대한 定義도 살펴보고자 한다


1). 道敎에 대한 定義


 (1). 사전적 의미 : 도교는 노장사상과 신선사상의 기반 위에 유교와 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무속신앙을 덧붙여서 형성시킨 일종의 교로서 그 창시자는 宋代 傅儉傳의 雲 七籤에 의하면 후한말 蜀나라 사람 장릉이라고 한다. 그는 촉나라의 작명산에서 수행하는 도중에 노자의 시현을 받아 <度人>, <北斗>등 경서 1000권을 얻어 구세제민을 선포하였다고 한다. (교육출판공사간, 세계대백과사전 p.212 구본명)

 (2). 李種殷 : 도교는 고대 중국의 애니미즘에서 출발하였다. 현세의 행복과 불로장생 등의 현세적 욕구와 민간의 잡다산 신앙을 기초로 한다. 신선설을 중심으로 하여 황노사상과 도가 그리고 역, 음양,오행, 천문, 점성, 무축 , 방술에다 유가사상의 일부와 불교의 체제를 모방하여 종교의식을 갖추었다. 한편 道敎徒를 道家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노장사상인 도가와 종교로서의 도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노자를 도교의 교조로 삼고 있고 또한 황노사상이 도교에 지대한 영향을 준 점에서 양자의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도교사 해설 p.7-8)

 (3). 李能和 : 이종은에 의하면 이 능화 저 조선도교사에는 도가와 도교의 관계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상으로서의 도가(노자, 장자를 위시한 關尹, 列子, 楊朱 등)와 종교로서의 도교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에 대하여 저자 이능화가 뚜렷이 주관을 세워 서술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 하고 있다. (조선도교사 해설 p.8)

그러나 이능화의 견해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을 인용해 본다.

`오두미교(도교의 연원=필자주)는 한말 서촉에서 장도릉이 시작한 것이다. 대개 우리 조선민족의 원시종교는 神道와 仙敎 뿐이었다. 나중에 유ㆍ불 양교가 들어오기는 하였어도 민간의 습성은 신도와 선교가 굳게 뿌리 박혀 있었으므로 오두미교가 들어왔을 때에는 나라 안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고 다투어 신봉하게 된 것이다.`(조선도교사 p.53)

 (4). 崔三龍 : 도교는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에서처럼 종단을 형성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의적인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포교활동을 행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의 비호나 지지를 받아 정책적으로 크게 선양한 적도 별로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도교의 위치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있어서 도교의 신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로서의 집단형태인 종단이 없었기 때문이다(중간생략). 또 한가지 도교가 우리의 의식 속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우리나라에는 상고시대부터 자생적으로 나타난 神敎 내지는 仙敎信仰이 존재하여

왔는데 삼국말 중국에서 수입된 도교와 유사한 점이 많아 유달리 외래한 중국도교와 크게 이질적인 요소가 없었다. 따라서 외래종교로서의 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동질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유교와 불교가 외래적인 종교로서 크게수용되어 민족사상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반면, 도교는 이들에 습합되거나 민간신앙인 무속과 밀착된 형태로 존재하여 왔다. 그러므로 한국의 도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 타종교 내지 신앙 속에 그 요소를 찾아볼 수 있고 독자적인 도교의 형태는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국인의 사유의 틀 속에는 아득한 시대로부터 도교적인 사상이 이미 스며진 모습으로 민족문화의 바탕을 형성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도교사상의 이해 p.297)

 (5). 구보 노리따다 : 도교라는 것은 고대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신선설을 중심으로 하며 그것에 도가, 주역, 음양, 오행, 참위, 의학, 점성 등의 설과 무속신앙을 더하고 불교의 조직과 체제를 모방해 종합한 불로장생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주술종교적인 경향이 강한 현세이익적인 자연종교라는 정의가 가능하다(구보 노리따다. 도교사 p.55).

 (6).韓禎燮 : 중국에 있어서 도덕적 유교사상에 비하여 가장 위대한 자연주의적 철학은 도교이다. 따라서 도교의 시조 노자도 공자에 지지 않을 만큼 위대한 성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공자의 역사는 뚜렷하지만 노자의 이력은 명확하지가 않다(중간생략). 도교의 경전은 실로 이 두 성자 (노자 및 장자=필자주)의 언행에서부터 비롯된다. 혹자는 도교를 황노의 도라 하여 황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 듯이 말하나 황제는 노자보다 2천년 전 사람이니 사상적인 영향은 받았을지 몰라도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공자의 학이 공자가 직접 창시한 것이 아니고 三皇五帝 堯舜禹湯 文武周公 등의 학설 위에 건립되었드시 노자의 학도 역시 중국 고대의 모든 자연주의적

입장에 서있는 성현군자의 사상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졌을 것이다. 특히 황제적인 것이 농후하므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로 도교의 경전은 太上玉訣, 三元符錄, 靈寶眞文 등 약 4천여 권에 달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가장 잘 알려지고 있는 성전은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남화경이다. (한정섭 편저 비교종교학 p.19)

 (7). 金東成 : 164년 桓帝(후한말 =필자주)는 수도에 묘를 건설하고 황제 자신이 하늘에 제사함과 같은 의식으로 노자의 제사를 지냈다. 도교단체가 조직된 뒤에 최초의 수령이라는 장도릉은 후한 시대에 나타났었고, 그 일파를 오두미도라 일컬었으니 신도는 각각 쌀 5두씩 바쳤다는 것이다. 2세기 말엽에 사천과 섬서에 이 교파가 지배하는 독립국이 수년간 보존되었었다. 이 교파에서 후세의 통속도교가 많이 나왔고 오늘날까지 道敎의 교주권은 장씨 가족이 가져왔다.(김동성 편역 중국문화사 p.79)








2). 仙敎에 대한 定義


 도교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의 정의를 구하기는 더욱 쉽지 않다. 단지 도교사상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는 글 중에 道仙家, 仙派, 仙道, 仙術, 仙方, 仙訣, 仙藥, 仙風, 神仙 등 `仙`자가 들어간 말들이 나오는 문맥의 전후를 살펴 선교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선교의 정의가 그처럼 흔치 않다고 하여 선교의 존재성을 의심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도교를 탐구함에 있어서 어떤 종단의 종명이 도교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듯이 선교 또한 교명으로서의 선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神仙敎라고 해야 선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도교적 교리를 그 핵심으로 갖고 있으며 종교적 형식을 갖추었으면 이름과 관계없이 도교로 보아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적 교리를 핵심으로 갖고 있으며 종교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선교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는 특정할 수 있는 교단이 존재했는가 여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선교를 문제삼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측면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선교는 곧 도교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둘째 선교가 도교가 아니라면 그런 존재로서의 선교가 실제로 존재하였으며 또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것이 도교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도교와 선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가지로 설이 갈린다.


(1). 선교를 도교로 보는 설


 이는 도교의 근본사상을 신선사상으로 보는 설로서 도교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신선이 되는데 있다고 한다.

 이종은 :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도교는 노자의 도덕경을 최상의 경전으로 하여 사상적 연원으로 삼고 노자를 교조로 섬기게 되었다. 또한 고래의 전통사상인 천인합일의 `역`사상과 도덕경의 사상적 관련에서 天道를 체득함으로서 불로장생하는 신선술을 도출하게 되었다. (조선도교사해설 p.10)

 이처럼 신선사상을 핵심교리로 하고 있는 종교가 있다면 이는 곧 선교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며 세상 사람들이 사실상의 문제로 이를 도교라고 부른다면 용인할 수 밖에 별도리가 없으나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선교는 곧 도교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좁은 견해라고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교의 핵심교리가 신선사상이고 도교의 핵심교리도 신선사상이며 선교나 도교 속의 다른 사상들은 나변에 불과하다고 할 때에만 타당한 설이다. 비록 선교에 있어서 신선사상 이외의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을른지는 모르나 도교에 있어서는 신선사상 말고도 중요한 사상들이 많이 들어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예컨대 노장철학이나 무속의 수많은 사상들도 도교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어떤 학자들은 도교교단이 성립할 때 세운 조직체계는 거의 불교의 조직체계를 답습했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에 대응하여 원시천존을 모신 게 그 예이다. 또 행위규범은 유교의 윤리설과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조직체계나 행위규범도 사상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이종은의 견해는 도교속에서의 신선사상을 강조하는 의미일 뿐 도교가 곧 선교라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


(2). 선교를 도교로 보지 않는 설


 선교를 도교로 보지 아니하는 설도 선교와 도교를 서로 무관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동양 고래로 민간신앙으로서 연면히 흘러온 종교라고 하는 측면에서 선교라는 용어를 선호하고는 있으나 성립도교를 무시할 수도 없는 측면에서 도교의 존재도 인정하고 다만 그 관계가 내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는 설이다. 내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것은 도교의 모태가 선교이고 그에서 출생하였으나 그 후 타 사상을 섭취하여 새로운 종교로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면 도교요 유ㆍ불ㆍ선 삼교 중 `선`하나만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면 선교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하나만의 `선`도 신선사상과 노장철학과 무속신앙이라는 광범위한 사상들의 혼합물이라는 것이 필자의 일관된 주장이며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바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는 앞으로 학계의 논구를 기다리고자 한다.

 실제상으로 선교가 어떻게 존재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도교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교단이 성립되기 이전에 종교교단으로서 성립된 것이 있다면 이는 선교요 또 선교교단이라고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유교가 성립되기 이전 불교가 동양 삼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종교가 성립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거의 전부가 선교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종교교단이 있었다면 그것을 선교교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양의 상고시대의 원시종교는 거의 전부 선교교단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선교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마당에 선교교단이라고 하면 너무 앞서간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 유교가 동양삼국에서 채택되고 불교가 흥성한 이후일지라도 어떤 특별한 이유에서 유와 불을 배척한 채로 신선사상이나 노장철학이나 무속신앙 중 어느 하나를 중심으로 하거나 혹은 세 개 모두를 바탕으로 해서 종교를 성립시켰으면 이것도 선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드시 도교로 화할려는 경향과 신선술가나 노장가나 무격처럼 개인신앙으로 돌아갈려는 경향 의 두 원심력 사이에서 선교는 쉽게 독자의 위치를 상실해 버리고 말지 않았는가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선교의 존재를 인정하기가 쉬우면서도

실제상으로 선교라고 할 수 있는 교명을 대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仙敎를 仙道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종교교단의 성립과 존재여부를 살피는 이 자리에서 다루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道의 경지가 宗敎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하나 이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Ⅳ. 道敎의 展開


1. 道敎의 發生과 成長


(1). 도교는 후한시대 촉나라 사람 장도릉이 창교한 종교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한대의 찬란했던 영화가 다하고 낙조가 서서히 스며들던 어둡던 시절이다. 통일된 한대에 세상 사람들은 권세 치복 영생의 욕망이 간절하여 무축과 산천기도에 전념하였고 한편 빈곤하였던 서민계급도 면액 발복 탈빈을 원하여 무축기도를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 풍조 속에서 소위 도사라는 인물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괴한 약품을 만들어 불사영생의 신선에 이르게 해 준다고 세상을 속였다. 널리 진나라 진시황의 예도 있지만 한무제 때 이소군, 소옹 등도 속아 넘어간 대표적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한편 한말에 이르자 관권의 전횡과 부패, 봉건귀족의 서민에 대한 착취, 그리고 지나친 허례허식을 내세운 유교사상 등이 민생고에 시달리는 당시 서민들을 몹시도 괴롭혀 그들의 불만과 반항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성장한 장릉은 병고, 빈고, 압박에 허덕이는 서민을 상대로 민속적 교단을 세웠고 노자의 도덕경을 암송하고 죄과를 참회하며 참회문을 천지신명께 바치도록 하였다. 이 교단은 탐관오리가 전횡하던 당시의 관권에 대한 반항을 기도한 반유교적, 반봉건적인 일종의 종교사회를 형성하려는 운동이었으므로 오두미적이라고 불리웠다. 그때가지 노장사상은 사대부계급에서 유행할 뿐이었으나 신선술가 또는 장도릉을 통하여 서민계급에 널리 퍼지게 되고 일개의 현인이요 지자에 불과했던 노자의 존재는 갑자기 신격화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장릉에서 시작되어 차차 그 세력이 커진 도교의 모태인 일명 천사도는 원래 서민적이고 반유교, 반불교적이었으나 교리 확립이 시급해지자 노장철학은 물론이요 유고와 불교로부터 오히려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서 그들의 교리에 유교의 가르침이 첨가되었고 한나라 무제의 신임이 깊었던 도사 도홍경은 유 불 노 삼교에 정통하였다.

 그리고 북위에서 구겸지가 출현하여 노자를 <교조>, 장릉을 <대종 >으로 하고 도교라는 명칭을 비로소 부쳤으며 이 사상은 이때부처 도교라고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2). 장릉에 의하여 천사도가 창교되고 이것이 후에 구겸지에 의하여 도교로 발전하였지만 장릉 이전에 이미 그와 유사한 종교적 결사가 형성되었던 중요한 예가 있으니 소위 장각의 태평도이다. 역사 속에서는 황건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황건은 옛 황제시대의 간이한 정치l를 찬양하고 유교적인 관권에 반항하는 표지로 사용하였다. 간길선인이 신탁에 의해서 얻은 영서 150권의 태평경에서 유래하며 토속종교적이고 반관권적이며 서민적인 점에서 오두미도와 마찬가지로 도교적 저항의식의 발로이었다. 장각과 간길은 오의 손책과 싸우다 살해되고 황건적은 평정되었다. 유교지배권에 대한 도교의 반항으로 한조의 멸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처럼 장각의 태평도는

평정되고 말았으나 똑같이 구세제민을 표방한 장릉의 천사도는 살아남았다. 초기에는 오두미도라고 불리웠느데 관권에 항거하기는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각이 일으킨 황건적의 난을 피하며 힘을 길렀다. 이리하여 손자 장노 때에 와서 조조와 일전을 결하였으나 마침내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서로 화해하고 장노는 제후에 봉해졌으며 널리 도교를 확산시키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3)도교가 크게 확장된 시기는 남북조시대로 그 중에서도 북위때였다. 이 시기에 구겸지가 나와 424년에 <녹도진경> 등의 도교에 관한 책을 태무제에게 헌상했으며 신천사도를 국교화하였고 천사도장을 왕명으로 건립하기까지 하였다. 또 황제가 스스로를 태평진군이라 부르고 년호도 같은 이름으로 바꾸고 황제의 몸이면서도 몸소 도단에까지 가서 법록을 받기도 했다 (442년). 태무제

이후 북위의 황제들은 즉위할 때마다 모두 도단에 가서 법록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고 한다.


(4). 이후 도교는 교리도 확립되고 의식도 정치해지면서 뛰어난 도사들도 속출하여 외관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당의 현종은 도교의 보호자가 되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원대까지는 곡절은 있었지만 황제의 기호여하에 따라서는 많은 지원이 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대 이후에는 활력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을 헤메게 된다. 이는 유교가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의연히 정치와 사회의 중심원리로서 기능한 것과 대비된다.

 또 불교가 비록 권세를 잃고 후에는 도교와 마찬가지로 타락하고 몰락했지만 그러나 중국인들의 정신세계에서 큰 역할을 했던 것과도 대비된다.

 무슨 이유로 도교는 성립종교로서도 또 정신적 지주로서도 실패하였을까. 무릇 역사의 잔영으로서 도교의 교단도 남아 있고 민간신앙으로서의 기능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꼭 실패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도교의 역할이 유교나 불교의

 그것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도교는 창교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알 수 있드시 사회개혁을 그 근본 목적으로 했지 황실의 보호 속에 안주하고자 했던 종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외계층들을 끌어모아 세력을 쌓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잡다한 사상들을 끌어모을 필요가 있었다. 유교건 불교건 선교간 간에 가릴 것이 없었다. 유교신봉자라고 해도 소외계층은 존재하게 마련이고 그건 불교인이건 선교인이건 간에 마찬가지이다. 세월이 흐르면 신분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지배계급에 반감을 가진 피지배계급에 속한 다수인들을 규합하기 위해 `유불선삼교합일`의 새로운 사상의 출현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이지 인간영혼의 구제차원에서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후세의 도사들이 구세제민의 근본목적을 잃어버리고 권력에 기생하고자 할 때 이미 도교로서의 생명력은 잃어버렸다고 할 것이다.


 둘째, `유불선삼교합일`이라는 말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유교와 불교와 선교를 합일한다는 것은 지극히 모순된 말이며 이러한 모순은 결코 극복되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그 한계를 노출시키고 말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도교인 자체로부터도 공격 받기도 했겠지만 유교나 불교로부터도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을 것이고 결국 이를 감당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삼교를 합일하는 통합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유교인 , 불교인 신선술가, 노장가, 무격(=무속인)으로 분해되어버리고자 하는 원심력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오고 있었을지라도 그 꿈을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상류계층에 속하는 도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뿐 하층에 속하는 서민대중들에게 있어서 구세제민이라고 하는 사회개혁의 꿈은 결코 잃어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꿈은 마치 휴화산처럼 깊고 깊은 곳에 잠복되어 있다가 때가 되면 활화산처럼 지상 위로 거대하게 분출하게 된다.




중국 역사상 민중반란의 대부분은 도교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보면 된다.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던 명태조 주원장도 그렇고 백련교도의 난도 그렇고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던 홍수전도 그렇다. 또 조선에서의 동학혁명도 도교에 의한 사회개혁운동이었다.


2. 중국의 도교와 우리나라의 도교와의 관계


(1). 흔히 도교는 중국의 민간종교라고 한다. 따라서 중국에는 도교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도교가 없다고 한다. 이는 글자 그대로 도교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관점에서 보는 견해로 이와 같은 논법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찌기 태평도니 천사도니 오두미도니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역사상 등장하는 수많은 민간종교들이 거의 전부가 도교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에는 불교를 위시해서 회회교, 마니교, 라마교, 기독교 등도 들어왔고 기타 수많은 이름 모를 종교들도 들어왔다. 세계국가로서의 중국에 모든 문물이 모여들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이 외래한 종교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토착화 과정을 밟았을 것이고 그 토착화 과정에는 중국 민중들 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도교적 성향과의 마찰과 융섭이 일어났을 것이다. 중화민족이라고 하는 민족적 자부심으로 가득찬 그들이 어떠한 외래종교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것을 송두리째 팽개쳐버리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오히려 외래의 것을 자기네들의 것으로 순화시켜버리는 데에서 문화적 우월감마져 느끼며 살아온 그들이다. 그 문화적 우월감의 바탕에는 태고 이래로 흘러내려온 전통적인 사상들 즉 신선사상이나 노장철학이나 무속신앙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를 종교적으로 체계화하고 여기에 유교사상과 불교사상 나아가 외래종교사상까지 포용하는 종합사상체계로서 도교가 성립되어 민중편에 서서 연면히 흘러내려왔다. 그러므로 도교가 중국의 민간종교라고 하기 보다는 중국의 민간종교를 도교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타당할지도

모른다.


 (2). 동아시아의 한편에 우거해온 우리나라에 있어서 종교적 측면에서 볼 때 중국과 아무런 차이가 있을수 없다. 원래 종교는 국경을 인정하지 않은 경향도 있지만 그런 점을 무시하더라도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종교적 단절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에게도 고래로 신선사상이 있어왔고 자연주의철학이 흘러내려 왔으며 무속신앙도 흘러넘쳤다. 오늘날 사학계의 일부에서 신선사상이 동이족에서 시작되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고 주장하고 있고 동이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니 중국문화의 기원은 우리민족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의 사실 여부는 사학계에서 규명할 필요는 있으나 이 자리에서 따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고전에 보면 산동반도 이동지방을 해동이라고 하여 신선이 사는 나라로 오래동안 치부해온 걸 볼 때 신선사상의 발상지에 대해서는 연구해 볼만 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바탕이 중국과 별로 다를 것이 없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도 도교적 성향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와 중국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에서는 성립도교가 존재하여왔고 우리에게는 성립도교가 존재하지 않은 채로 민간신앙 형태로 흘러 내려왔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물론 더 연구해 보아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도교가 우리 의식 속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우리나라에는 상고시대 이래로 자생적으로 나타난 神敎 내지 仙敎 信仰이 존재하여왔는데 삼국말 중국에서 수입된 도교와 유사한 점이 많아 유달리 외래한 중국도교와 크게 이질적인 요소가 없었다. 따라서 외래종교로서의 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동질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유교와 불교가 외래적인 종교로서 크게 부각되어 민족사상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반면 도교는 이들에게 습합되거나 민간신앙인 무속과 밀착된 형태로 존재하여 왔다.

 우리나라에는 과연 성립도교 즉 도교교단이 존재하지 아니했을까.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있는 풍류도가 먼저 떠오른다. 고운 최치원은 그 글에서 풍류도에는 유불선 삼교가 포함되어있다고 밝히고 있다.



國有玄妙之道 曰 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卽孝於家 出卽忠於國 魯司冠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이 풍류도는 풍월도 또는 화랑도라고도 하며 그들을 국선도라고 불렀느데 이는 유와 불과 선이 포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건 곧 그를 포함하여 합일했음을 뜻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랴. 더욱이 여러 명칭으로 불려지고 그 교도들을 국선도라고 불렀다면 이는 성립도교의 존재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중국도교사`의 저술가 傅勤家는 말하기를 , 화랑도가 중국 도교의 성격과 흡사한 점이 많음을 지적하면서 중국 도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는 최치원의 <鸞郞碑序>에 국유현묘지도의 내용이 유ㆍ불ㆍ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운운한 점을 감안하여 화랑도도 도교와 매우 유관하다고 하였다. 그는 화랑도가 도교와 유사하다고 하였으나 이 유사하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도교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에 대해 충분한 학문적 토대가 부족하므로 완곡하게 표현한 게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미흡한 표현이고 부정확한 표현이고 어쩌면 부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는 화랑도가 곧 도교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우리는 `유사`하다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분석을 차치하더라도 소위 중국의 민족종교인 도교가 화랑도와 유사한 것인지 화랑도가 중국의 그것에 유사한 것인지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도교의 바탕이 신선사상과 자연주의철학(노장철학)과 무속신앙과 유교와 불교라고 할 때 우리나라와 중국을 분별해 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성립도교 즉 도교교단이 어느 나라에서 먼저 생겼느가 하는 점은 그것이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합일(=종합, 포함, 융섭, 교합, 통합 등도 같은 의미임)의 작업은 특출한 종교적 귀재의 출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종교적 귀재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요는 도교적 사상의 연원은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 분별의 실익이 없으나 조직된 교단의 출현은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 바가 있으므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중국의 도교는 교단이 형성되어 연면히 흘러나왔고 또 그 아류들도 수없이 많이 분파되어 성립도교로서 산재하여 왔으나 우리나라는 신라의 멸망 이후 조선조 말엽까지 성립도교로서는 존재하지 아니하고 민간신앙의 개인차원으로써만 흘러내려 왔다. 왜 우리는 신라멸망 이후로 성립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고려의 불교나 조선의 유교가 배타적이어서 타종교 예컨대 고려시대에 유교나 도교를 , 조선시대에 불교나 도교를 종교교단으로서 인정해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고려의 불교나 조선의 유교가 모두 집권자를 위해 봉사하는 종교로서 기능하면서

피지배계층을 강력하게 통제하여 왔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둘째, 과거 중국의 태평도나 천사도처럼 또 그 후의 홍건적이나 태평군처럼 민중의 힘으로 왕권을 무너뜨릴려는 민중반란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점은 도교교단이 없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민중반란이 없었다는 말도 성립되므로 충분한 이유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쨋건 간에 우리나라에서 신라가 멸망한 이후로 동학이 창도되던 1860년 이전까지의 근 900년간에 걸쳐서 도교 교단이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사가들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고 필자의 천박한 학문으로 단정내릴 수는 없지만 외침에 피폐할 대로 피폐했던 고려조나 세계사적으로 흔치 않은 500여년 간의 조선왕조체제를 두고 볼 때 도교교단의 성립은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3. 우리나라 도교의 시대적 구분


(1). 제1그룹


 이 그룹은 개인차원의 도교사상가들을 나열해 본 것으로 통시적으로 존재하는 그룹이다. 또 제2그룹 혹은 제3그룹의 교단 형성에 기초가 되기도 하고 교단 와해의 원심력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그룹이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종교세계에 입문하게 되며 그 때에 얻게 되는 경험은 때로는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다수인의 공유일 수도 있다. 만일 다수인과의 공유가 개인보다 우선할 때에는 교단에 참여하거나 교단조직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개인적 경험이 우선할 때는 교단에의 참여를 거부하거나 이미 참여했던 교단으로부터 탈퇴하기도 한다. 종교적 경험이란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말이나 신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언어도단의 경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2). 제2그룹


 이 그룹은 선교교단을 나타낸다. 도교가 수입되기 이전의 교단이라고 함은 예컨대 단군이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신단수하에 내려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제세이화의 세계를 펼쳤다고 할 때 그러한 이념을 받들어 현실 속에 실현시키는 일들은 교단이라고 하는 조직체가 담당하였을 것이다. 이 때 그들이 갖고 있는 사상이 신선사상, 자연주의 철학, 무속신앙으로 체화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런 집단을 선교교단이라고 부른 것이다. 도교가 수입 혹은 출현하기 이전일지라도 군왕이나 부족장들이 정교미분리 상태에서 제천의식을 행하였다면 이러한 정치권력집단은 곧 종교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삼한에서의 소도행사, 고구려의

동맹, 백제에서 천제와 오방천제에게 제사한 일 , 신라의 팔관재 등이 그러한 선교교단의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전기

(도교 수입 이전,

고구려 영류왕 7년 이전)

중기

(도교 수입 이후,

동학 창도 이전)

후기

(동학 창도

1860년 이후)

1

유가

불가

신선술가

노장가

무격

유가

불가

신선술가

노장가

무격

 

2

선교교단 - 신선사상가

(선교인)       노장가

                무격

선교교단 - 신선사상가

(선교인)       노장가

                무격

선교교단 - 신선사상가

(선교인)       노장가

                무격

3

-

도교교단 - 신선사상가

(화랑도)       노장가

                무격

                유가

                불가

도교교단 - 신선사상가

(화랑도)       노장가

                무격

                유가

                불가



도교가 수입된 후부터 동학이 창도되기 이전까지 중기 약 1200년 간은 사회제도가 어느 정도 발달하고 현실적인 정치권력이 종교보다 우위에 서게 된 시기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나 그 후의 고려가 정치권력 우위의 입장에서 불교를 국교로 선택했고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기존의 종교조직 즉 선교교단이 정치권력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은 물론 오히려 억압을 받았을 것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선교교단은 민중 속에 희미하게 명맥을 이어왔을 것으로 보여진다.

 도교가 수입되는 시점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그 이전에는 선교사상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던 시대이고 그 이후는 불교사상 혹은 유교사상를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렸던 시대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점을 발견함으로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하나의 이정표를 긋는 셈이 될 것이며 이에 대한 후학들의 연구를 기대한다.

 1860년 이전에는 유교교단과 불교교단을 제외하고 눈에 띨만한 교단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제우가 나옴으로 해서 선교교단을 거치지 않고 직접 도교교단으로 창도되어 이 세상에 출현했다. 필자의 논리대로 라면 제1그룹으로서의 신선술가나 노장가나 무격들이나 유가나 불가가 득도한 최제우를 만나 일거에 도교교단을 조직한 셈이다. 그러나 실은 역사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민중 속에 연면히 흘러내려온 선교교단의 토대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논리를 발견해야 한다.

 동학은 최제우가 1860년에 창도한 종교이고 유불선삼교를 합일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도교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제2그룹에서 다루는 동학창도 이후 선교교단이라고 함은 동학을 지칭한 것은 아니고 동학이 출현한 이후에 동학을 모방하면서도 유와 불을 배척하는

교단이 있다면 이러한 교단을 말하는 것이다. 즉 동학이 창도된 이후에 그에 유사한 아류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데 그후에 교주가 죽거나 어떤 이유로 분열하면서 유불선 중 선하나만을 선택한 교단을 말한다. 어떤 종교적 천재가 있어 세상의 종교를 합일하여 전무후무한 무극대도를 창도한다고 큰 소리치지만 그가 죽고 제자들만 남게 되면 창교주의 가르침은 재해석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보면 유교로 돌아가거나 불교로 회귀하거나 선교로 남게 되기도 한다. 이는 원래 개인차원의 유가와 불가 그리고 신선술가, 노장가 그리고 무격들이 합일의 묘법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대체로 유가나 불가는 다시금 유교교단이나 불교교단을 찾아가지만 신선술가나 노장가나 무격들은 선교교단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개인차원의 구도생활로 들어가기도 한다.


(3). 제3그룹


 이 그룹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에 화랑도가 있다. 최치원은 화랑도를 풍류도라고 하였고 또 풍월도라고도 하였다. 이름이 조금씩 달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 도교이고 도교교단이다. 그런데 신라 멸망 이후로 도교교단이라고 할만한 것이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 아류라고 할만한 것도 역시 잘 보이지 않는데 그 최대의 이유는 불교 혹은 유교의 정돈된 교리체계와 사회안정과 국가체제의 확립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민중 측면에서 본다면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고 할 수 있고 국가 측에서 보면 국론의 분열이 없었으니 긍정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후삼국시대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참칭한 적이 있는데 그도 옛날 천사도처럼 민중을 무민해 세상을 뒤엎기 위해서 종교적 카리스마를 동원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도교교단의 교주였던 셈이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가 1860년(경신년) 4월 5일에 만고에 없는 무극대도를 선포함으로서 창도되었다. 그가 살던 시기는 망국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던 때이다. 중국에서도 태평천국난이 발생하여 소위 천하대란에 휩쌓이던 시절이다. 최제우는 국가의 존망이 경각에 달려있던 시절에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창생제도에 나섰다.


 그후 그는 체포되어 1864년 대구 감영에서 사형이 집행되었고 2대 교주 최시형이 30년간 강원도 산골에 숨어살면서 비 구름 바람맞으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1894년 갑오년에 고부에서 전봉준이 동학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기포하는데 기반을 제공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이 군대를 파병해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국운이 급속히 기울어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되었으며 3대 교주 손병희가 교단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중흥을 도모하고 그 여세를 몰아 3.1운동을 주도한 것도 역사 그대로 이다.




Ⅴ. 맺는 말


(1).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난 후 꿈을 버리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모방해 도교교단을 조직했고 그 중에서 강증산계열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는데 역시 몇번의 교변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고 수많은 아류들이 생겨나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공통점은 모두 종교통합을 말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정확히는 유불선삼교합일을 핵심사상으로 갖고 있다는 점이다. 내거는 구호들도 대동소이하다. 천하의 대도이고 전무후무하며 천지신명의 명이 있었고 선천시대가 가고 후천시대가 오고 있으며 한국이 중심이 되고 개벽이 된다는 것들이다. 이는 장도릉이 한나라 황실에 반항하던 때에 내걸던 것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무극대도는 전무후무가

아니라 전에도 있었고 후에도 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잡다한 동양 사상의 유합이 도교인 것처럼 신흥민족종교계열의 교리도 잡다하기가 그지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핵심교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의외로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유불선삼교합일사상>이라는 말은 동양의 종교를 이해하는 키워드이다.

 

(2). 도교적 사상들은 우리나라와 중국과 일본에서 정신적 바탕이 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종교로서 <도교>라는 말을 쓰는 게 대중들에게는 낯설은 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도교라는 말이 대중적이기 보다는 학술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도교인들에게는 그들이 종교적으로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아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소망하는 것을 과연 이룰 수 있을 것인가와 그렇다면 어떻게 이룰 것인가 그리고 그게 언제인가 하는 것들이다.


(3). 도교적인 여러 사상들은 두 갈래로 발전해 왔다. 하나는 종교의 길로 나아갔고 다른 하나는 사회개혁의 이데올로기로 화했다. 때로는 성공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다. 사상이란 때를 만나면 안개가 구름이 되어 비를 뿌리듯이 그렇게 세상을 바꾼다.

이 글은 처음에 도교적인 것들이 어떻게 사회개혁의 동기와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작했으나 역부족임을 느낀다. 단지 도교인들이 기존의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에 대하여 절대성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종합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에서 그들이 가진 엄청난 사유의 폭을 발견한 걸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그러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출처 : 한민족사 연구회
글쓴이 : 이공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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