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부산 시약산 산제당
[뉴스 톡톡] 시약산 최제우 사당 살린다
노거송을 품은 채 커다란 바위 위에 서 있는 모양새가 어딘지 예사롭지 않다.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여동생이 오라버니의 뜻을 기리기 위해 1860년에 세운 '시약산 산제당'이다. 제당 안의 오래된 탱화 3점이 옛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한가운데가 호랑이를 거느린 백발의 최제우 선생. 왼쪽이 여동생 최씨, 오른쪽이 부인 하씨이다.
서대신동 재개발로 헐릴 위기
인근에 제당 짓고 탱화들 옮겨
이 제당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됐고, 최제우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지만 한 달 전만 해도 철거 위기에 놓여 있었다. 재개발 조합원들이 미신을 숭배하는 혐오시설이라며 없애버리려 했던 것이다. 2004년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의 문화재지표조사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올해 조합 측이 재조사를 의뢰했을 때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현 산제당은 1978년에 신축된 콘크리트 건물이라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지난달 2일 부산시 문화재위원들이 재차 조사를 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주변의 적당한 장소에 똑같은 형태로 제당을 다시 짓고, 탱화 3점을 그대로 옮겨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부산시 문화재위원회 배도식 위원은 "건물 자체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낮지만 산제당은 마을 사람들의 정서와 옛 풍속이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라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당산과 제당은 한동안 아기를 점지해 주고, 병을 낫게 해주며, 마을의 평화를 지켜주는 공간으로서, 민속신앙의 중심 구실을 했다. 2005년 부산시의 학술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산지역의 당산과 제당 수는 294개로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다. 80년대 이후 시나브로 사라진 산제당까지 합치면 과거에는 300여개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김승찬 명예교수는 "당산과 제당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제를 올리며 유대감을 키우는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면서 "유서 깊은 몇몇 산제당들은 민속자료로 지정해 보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대진 기자 djrhee@
- 위 치 : 서대신3가 172번지
- 神의 명칭 : 東學 교주 崔濟愚ㆍ부인 晉陽河氏ㆍ여동생 崔氏여인
서기 1860년(철종 11년) 崔濟愚가 동학을 창시하여 보국안민과 제세구민의 근간이 동학이라는 신념하에 전국에 포교운동을 펼치자 당시 조정에서 강압적인 검색을 하자 최씨여인은 가출하여 은둔생활로서 오라버니인 최제우의 못 다한 포교정업의 결실을 거두고자 홀로 치성지를 찾아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이 곳 부산으로 들어와 시약산을 둘러보고 마음속으로 내정으로 목욕제계하며 9일간 식음을 단절하고 기도 끝에 산신령의 현몽으로 이 시약산을 점지받아 이 곳에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산신당을 설림하고 기도에 몰두하여 동염신명함에 이르렀다.
세월이 지난 후 최씨 친정조카 최씨(이름 미상)와 그의 부인(진양 하씨)이 최씨 여인의 노후를 보살피기 위해 이 곳에 왔다가 최씨 여인의 치성에 감동하여 유지를 계승코자 영도 봉래산 중턱에 별도로 제단을 설립하여 지성으로 기도 끝에 이 또한 통염신명함에 인근 주민들이 이 곳을 하씨신당이라 칭하고 지금도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모시고 있다 한다.
이러한 사연이 세상에 밝혀짐에 따라 원근 주민들의 숭앙을 받아 오던 최씨 여인이 명을 다하여 영면함에 서부 주민들이 자진하여 산신당을 개축하여 &lsquo시약산 제당&rsquo이라 이름 짓고 최제우와 부인 진양 하씨, 여동생 최씨 여인 등 세분의 영정을 동시에 봉안하여 그 분들의 &45332을 위로하고 또한 동네의 평안함을 위한 산신제를 해마다 음력 10월 15일에 지내고 있다.
제일 일주일 전부터 운영위원 중 그의 집안에 흉사가 없고 부정을 타지 않은 위원 3인을 제관으로 선정하여 금줄을 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매년 음력 10월 15일 새벽 1시경 20명의 운영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유가식 제례절차에 의하여 마을에 평안과 번영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며, 제사를 모시고 나면 참석한 제관 및 운영위원 그리고 이웃주민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술잔을 돌리며 음복을 한다.
1860년에 건립된 산제당(山祭堂)은 수운(水雲)최제우(崔濟愚)[1824~1864]의 여동생이 세웠다고 전한다. 산제당에 있는 ‘서대신3동 운영위원회’의 「시약산 산제당 약사(蒔藥山山祭堂略史)」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산제당은 1860년 초여름에 축조되었다. 전래에 의하면, 당시 진양에 거주하던 최씨 여인이 시약산 산신령의 현몽으로 이곳을 점지 받아 몸소 제단을 설치하고 평생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 뒤 세상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최 여인은 본래 수운 대사최제우 선생과 남매간이었다고 한다. 최제우 선생이 동학(東學)을 창시하고 포교 활동을 하여 조정의 탄압을 받게 되자, 최 여인은 이곳에 은둔했다. 세월이 흘러감에 친가의 조카뻘 되는 최씨와 그의 부인[진양 하씨] 내외가 고모 되는 최 여인을 보살펴 주다가 고모의 치성에 감동하여 유지를 계승코자 영도고갈산(枯渴山)[봉래산] 기슭에 별도로 신당을 지어 기도했는데, 후에 이 당을 ‘하씨(河氏) 신당’[영도구 신선동의 아씨 신당]이라 일컫게 되었다.
최 여인이 죽자 서대신동 사람들이 자진 합력하여 산신당을 개축 건립하여 ‘시약산 산제당’으로 이름 짓고, 세 분의 영정[수운대사 영정, 수운대사 합부인 진양 하씨 영정, 최씨 여인 영정]을 봉안하여 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서대신동의 안과태평을 위한 산신제와 시향제(時享祭)를 모셔 왔다고 한다. 현재의 산제당 건물은 1978년에 신축하고 단장한 것이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山祭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돌담 안에 두 건물 중 왼쪽 것이 산제당이다. 지붕은 기와 우진각이며, 벽은 블록을 쌓아 시멘트로 마감하였고, 문은 여닫이 두 짝 나무문이다. 제단은 나무 제단으로 위패는 없고, 영정이 액자 속에 들어 있는데, 왼쪽으로부터 최제우 여동생, 최제우[산신도], 최제우 부인 순서로 걸려 있다.
절차
서대신3동 시약산 산제당 운영위원회에서 제주를 선정하여 제사를 모셨으나, 2006년에 서대신동이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됨에 따라 운영위원회는 해체되고, 현재는 이수경[여, 66세]이 동네의 부인[보살]들과 합심하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비는 신당에 개인 치성을 하러 와서 내어놓는 시주금으로 마련하고, 제물은 부평동 시장에 가서 구입한다.
절차는 세 분의 영정 앞에 메와 국[무·두부·오징어를 넣어 끓인 탕]을 각각 진설하고 나머지 제물은 맨 앞줄에 대추·밤·배·감·사과·바나나·수박·참외를 놓는데, 10월이라도 수운이 수박과 참외를 좋아했기 때문에 꼭 올린다고 한다. 둘째 줄에는 조기구이·민어구이·돼지머리·꽃게맛살부침·고사리나물·콩나물·도라지나물 등을 놓는다. 그리고 떡으로는 흰시루떡·팥시루떡·콩시루떡을 제상에 놓는다.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제주인 이수경이 분향·재배하고, 이어 각 영정 앞에 헌주하고 다시 재배한다. 그리고 밥 위에 숟가락을 꽂고 난 뒤[揷匙正箸], 손을 비비면서 국태민안과 풍요를 기원한다. 잠시 뒤 밥뚜껑을 닫고[撤匙覆飯], 이어 최제우와 그 부인 및 누이를 위한 소지(燒紙)를 한 장 올리고 나면, 참례자들이 각자 소지를 올린다.
현황
현재 시약산 산제당제는 제당이 서대신동 재개발 구역 안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노력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시약산 산제당의 창건 연도인 1860년은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한 해이다. 따라서 이때 그 누이 최씨가 시약산의 산제당을 동학의 접소(接所)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최제우의 조카뻘 되는 최씨의 아내 하씨가 고갈산 밑에 산제당을 세운 점으로 보아, 시약산의 산제당은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제당인 만큼 길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 『부산의 당제』(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 인터뷰(시약산 당산제 제주 이수경, 여, 66세, 2011. 6. 3)
부산 서구 서대신3동 3가 172번지 10통지역 재개발 지구.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어 버려서 폐허
이 산제당은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 ~ 1864) 선생의 여동생이 오라버니의 큰 한가운데가 호랑이를 거느린 백발의 최제우 선생. 왼쪽이 여동생 최씨, 오른쪽이 부인 하씨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60년(철종 11년)즈음부터 보국안민과 제세구민의 신념하에 전국에 포교운 동을 펼치다가 당시 조정으로부터 강압적인 박해를 받았다.
이 산제당을 세웠다는 최씨 여인은 오라버니인 최제우가 못 다한 포교정업의 결실을 거두고자 홀로 치성지를 찾아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이 곳 시약산 자락에서 목욕재계하고 9일간의 단식 기도 끝에 산신 령이 현몽으로 가르켜 준 이 곳에 조그만 제당을 짓고, 기도에 전념하여 삼라만상의 운행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그 후, 최여인의 친정조카(이름 미상)와 최제우의 부인(진양 하씨)이 이 곳에 왔다가 최씨 여인의 치성에 감동하여 그 유지를 계승하고자 영도 봉래산 중턱에 별도로 제단을 세우고 지성기도 끝에 부인 또한 신명을 얻음에 인근 주민들이 이 곳을 하씨신당이라 칭하고 지금도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모시고 있다 한다.
원근 주민들의 숭앙을 받아 오던 최씨 여인의 입적후 지역 주민들은 자진하여 산제당을 개축하면서 ‘시약산 산제당‘이라 이름 짓고, 최제우와 부인 진양 하씨, 여동생 최씨 여인 등 세 분의 영정을 함께 봉안하여 그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또한 동네의 평안함을 위한 산신제를 해마다 음력 10월 15일에 지내고 있다.
이 제당은 부산에서도 가장 오래된 제당이고, 최제우 선생을 모신 곳이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철거 위기에 놓여 있었다. 재개발 조합에서 동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제당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려 한 것이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 이 제당으로 인해 경관은 물론, 개발에도 엄청난 부담으로 올 것이니, 미신을 조장시키는 혐오 시설로 몰아 철거해 버리려 했던 것이다..
2004년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의 문화재지표조사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2009년 재개발로 철거가 시작할 무렵, 조합 측이 재조사를 의뢰했을 때는 정반대의 결과로 현 산제당은 1978년에 보수된 콘크리트 건물이라 사료로써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부산시 문화재위원들이 재차 조사를 했고 절충안을 낸 것이, 주변의 적당한 장소에 똑같은 형태로 제당을 다시 짓고, 탱화 3점을 그대로 옮겨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부산시 문화재위원회 배도식 위원은 "건물 자체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낮지만 산제당은 마을 사람들의 정서와 옛 풍속이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라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고 했고, 우리 조상들의 민간신앙에도 당산과 제당은 한동안 아기를 점지해 주고, 병을 낫게 해주며, 마을의 평화를 지켜주는 공간으로서, 민속신앙의 중심 구실을 했었다.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김승찬 명예교수도 "당산과 제당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제를 올리며 유대감을 키우는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면서 "유서 깊은 몇몇 산제당들은 민속자료로 지정해 보전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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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grandculture.net/contents.aspx?use=&lc=GC042&ct=C&ctid=C00002&contid=GC04203362
정의]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3동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시약산 산제당제는 음력 10월 14일 자정에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3동 683번지에 있는 산제당에서 국태민안과 마을의 풍농·풍어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1860년에 건립된 산제당(山祭堂)은 수운(水雲)최제우(崔濟愚)[1824~1864]의 여동생이 세웠다고 전한다. 산제당에 있는 ‘서대신3동 운영위원회’의 「시약산 산제당 약사(蒔藥山山祭堂略史)」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산제당은 1860년 초여름에 축조되었다. 전래에 의하면, 당시 진양에 거주하던 최씨 여인이 시약산 산신령의 현몽으로 이곳을 점지 받아 몸소 제단을 설치하고 평생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 뒤 세상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최 여인은 본래 수운 대사최제우 선생과 남매간이었다고 한다. 최제우 선생이 동학(東學)을 창시하고 포교 활동을 하여 조정의 탄압을 받게 되자, 최 여인은 이곳에 은둔했다. 세월이 흘러감에 친가의 조카뻘 되는 최씨와 그의 부인[진양 하씨] 내외가 고모 되는 최 여인을 보살펴 주다가 고모의 치성에 감동하여 유지를 계승코자 영도고갈산(枯渴山)[봉래산] 기슭에 별도로 신당을 지어 기도했는데, 후에 이 당을 ‘하씨(河氏) 신당’[영도구 신선동의 아씨 신당]이라 일컫게 되었다.
최 여인이 죽자 서대신동 사람들이 자진 합력하여 산신당을 개축 건립하여 ‘시약산 산제당’으로 이름 짓고, 세 분의 영정[수운대사 영정, 수운대사 합부인 진양 하씨 영정, 최씨 여인 영정]을 봉안하여 가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서대신동의 안과태평을 위한 산신제와 시향제(時享祭)를 모셔 왔다고 한다. 현재의 산제당 건물은 1978년에 신축하고 단장한 것이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山祭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돌담 안에 두 건물 중 왼쪽 것이 산제당이다. 지붕은 기와 우진각이며, 벽은 블록을 쌓아 시멘트로 마감하였고, 문은 여닫이 두 짝 나무문이다. 제단은 나무 제단으로 위패는 없고, 영정이 액자 속에 들어 있는데, 왼쪽으로부터 최제우 여동생, 최제우[산신도], 최제우 부인 순서로 걸려 있다.
[절차]
서대신3동시약산 산제당 운영위원회에서 제주를 선정하여 제사를 모셨으나, 2006년에 서대신동이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됨에 따라 운영위원회는 해체되고, 현재는 이수경[여, 66세]이 동네의 부인[보살]들과 합심하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제비는 신당에 개인 치성을 하러 와서 내어놓는 시주금으로 마련하고, 제물은 부평동 시장에 가서 구입한다.
절차는 세 분의 영정 앞에 메와 국[무·두부·오징어를 넣어 끓인 탕]을 각각 진설하고 나머지 제물은 맨 앞줄에 대추·밤·배·감·사과·바나나·수박·참외를 놓는데, 10월이라도 수운이 수박과 참외를 좋아했기 때문에 꼭 올린다고 한다. 둘째 줄에는 조기구이·민어구이·돼지머리·꽃게맛살부침·고사리나물·콩나물·도라지나물 등을 놓는다. 그리고 떡으로는 흰시루떡·팥시루떡·콩시루떡을 제상에 놓는다.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제주인 이수경이 분향·재배하고, 이어 각 영정 앞에 헌주하고 다시 재배한다. 그리고 밥 위에 숟가락을 꽂고 난 뒤[揷匙正箸], 손을 비비면서 국태민안과 풍요를 기원한다. 잠시 뒤 밥뚜껑을 닫고[撤匙覆飯], 이어 최제우와 그 부인 및 누이를 위한 소지(燒紙)를 한 장 올리고 나면, 참례자들이 각자 소지를 올린다.
[현황]
현재 시약산 산제당제는 제당이 서대신동 재개발 구역 안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노력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시약산 산제당의 창건 연도인 1860년은 최제우가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한 해이다. 따라서 이때 그 누이 최씨가 시약산의 산제당을 동학의 접소(接所)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최제우의 조카뻘 되는 최씨의 아내 하씨가 고갈산 밑에 산제당을 세운 점으로 보아, 시약산의 산제당은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제당인 만큼 길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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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7.jsp?cid=66950&gotoPage=1945&searchGubun=&guCode=&sidoCode=
고 또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만큼 산자락마다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서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동네 구석켠에 자리 잡고 있던 당산이나 산제당들 마저 하나 둘씩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
이다.
2005년 부산시의 학술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산지역의 당산과 제당 수는 294개로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다. 80년대 이후 사라진 산제당까지 합치면 과거에는 300여개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
정된다.
부산 서구 서대신3동 3가 172번지 10통지역 재개발 지구.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어 버려서 폐허
처럼 변한 이 지역에 엄청 큰 바위 하나를 안고 홀로 우뚝 서 있는 산제당이 있다. 노거송 4그루
가 둘러 싸고 있고, 담장밖에는 영도 산신할머니가 던져 주었다는 전설을 가진 큰 바위 하나가 주
위를 압도하는 위엄스런 형태로 지키고 있는 이 산제당은 규모는 작지만 앉은 지세나 튕겨져 나오
는 기운으로 봐서도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기에 충분한 제당이다.
이 산제당은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 ~ 1864) 선생의 여동생이 오라버니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1860년에 세운 '시약산 산제당'인데. 제당 안에는 오래된 탱화 3점이 걸려 있
다. 한가운데가 호랑이를 거느린 백발의 최제우 선생. 왼쪽이 여동생 최씨, 오른쪽이 부인 하씨
다.
최제우가 1860년 경주 용담정에서 깨우친 도가 시천주(侍天主) 신앙인 동학(東學)이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믿어 오던 한울님 사상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라는 교리를 완
성하여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60년(철종 11년)즈음부터 보국안민과 제세구민의 신념하에 전
국에 포교운동을 펼치다가 당시 조정으로부터 강압적인 박해를 받았다
이 산제당을 세웠다는 최씨 여인은 오라버니인 최제우가 못 다한 포교정업의 결실을 거두고자 홀
로 치성지를 찾아 각지를 돌아 다니다가, 이 곳 시약산자락에서 목욕제계하고 9일간의 단식 기도
끝에 산신령이 현몽으로 가르켜 준 이 곳에 조그만 제당을 짓고, 기도에 전념하여 삼라만상의 운
행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그 후 최여인의 친정조카(이름 미상)와 최제우의 부인(진양 하씨)이 이 곳에 왔다가 최씨 여인의
치성에 감동하여 그 유지를 계승코자 영도 봉래산 중턱에 별도로 제단을 세우고 지성기도 끝에 부
인 또한 신명을 얻음에 인근 주민들이 이 곳을 하씨신당이라 칭하고 지금도 정성을 다하여 받들
어 모시고 있다 한다.
원근 주민들의 숭앙을 받아 오던 최씨 여인의 입적후 지역 주민들은 자진하여 산제당을 개축하면
서 ‘시약산 산제당‘이라 이름 짓고, 최제우와 부인 진양 하씨, 여동생 최씨 여인 등 세분의 영
정을 함께 봉안하여 그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또한 동네의 평안함을 위한 산신제를 해마다 음
력 10월 15일에 지내고 있다.이 제당은 부산에서도 가장 오래된 제당이고, 최제우 선생을 모신 곳
이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철거 위기에 놓여 있었다. 재개발 조합에서 동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
는 이 제당을 불도저로 밀어 버리려 한 것이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 이 제당으로 인해 경관은
물론, 개발에도 엄청난 부담으로 올 것이니, 미신을 조장 시키는 협오 시설로 몰아 철거해 버리
려 했던 것이다..
시나 구청에서도 외면 받고 있는 이 제당을 동네 노인분들과 이 제당을 지키고 있는 이수경보살
과 가족들이 몸으로 막고 또 막은 노력으로 겨우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만 언제 또 사단이 일어 날
지 몰라서 보살부부는 아예 이 제당에 붙은 조그만 골방에서 비닐로 바람을 막은채 기거를 하고
있었다.
2004년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의 문화재지표조사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2009
년 재개발로 철거가 시작할 무렵, 조합 측이 재조사를 의뢰했을 때는 정반대의 결과로 현 산제당
은 1978년에 보수된 콘크리트 건물이라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부산시 문화재위원들이 재차 조사를 했고 절충안을 낸 것이, 주변의 적당한 장소에 똑같은
형태로 제당을 다시 짓고, 탱화 3점을 그대로 옮겨 보존하기로 한 것이다. 근데 이게 말이 되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봐서 제당이라는 건물이 아무데나 옮겨 보존 한다고 해서 제당 본래의 기능을
유지 할수 있을까....
집 한칸을 늘이고, 정자 하나를 지어도 풍수에 밝은 지관이 그 땅의 기맥과 흐름을 보고, 좌향을
잡고 규모를 정해서 세우는데...아무리 주변 여론이 개발 제일주의에 편승되고 그 편의성에 따
른 문화재위원들의 해석과 중재안을 내어 놓았다 하더라도, 이런 식의 보전 방편은 좋은 방향이
못되는 것 같다..
부산시 문화재위원회 배도식 위원은 "건물 자체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낮지만 산제당은 마을 사람
들의 정서와 옛 풍속이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라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고 했고, 우리조상
들의 민간신앙에도 당산과 제당은 한 동안 아기를 점지해 주고, 병을 낫게 해주며, 마을의 평화
를 지켜주는 공간으로서, 민속신앙의 중심 구실을 했었다.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김승찬 명예교수
도 "당산과 제당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제를 올리며 유대감을 키우는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면서 "유서 깊은 몇몇 산제당들은 민속자료로 지정해 보전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
했다.
요즈음도 매월 음력 초하루와 길일에는 제를 모시는 제자들과 일부 민간신앙인들의 치성 기도처
로 이용되고 있는 이 산제당이 비록 동네언덕 한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아파트단지 구성에 방해
가 되고 일부사람들의 철거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깔끔하게 정비하고 소공원화해서 잘 가꾸어 나간
다면 우리 민속문화재도 지키고, 마을도 지켜주는 제당으로서 보존가치가 충분하지 않을까...
향토자원 정보
1. 본 향토자원의 명칭과 유래 | ||
---|---|---|
명칭(한문/별명) | 시약산 산제당 | |
명칭자 또는 단체명 | ||
명칭의 유례 | 지역과의관계 | 시약산 자락에 위치 |
특정인물과의 관계 | 최제우 | |
특정 소재와의 관계 | 민속신앙 | |
심장(실벌), 설화, |
2. 본 향토자원의 특성 | ||
---|---|---|
자원의 개요 |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 ~ 1864) 선생의 여동생이 오라버니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1860년에 세운 '시약산 산제당' | |
기후, 토양 등 지정학적 특성 | 산제당은 마을 사람들의 정서와 옛 풍속이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공간 | |
기술적특성 | 핵심기술 | |
기술을 통해 나온 결과물 및 효과 | ||
기술 보유자의 수 | ||
기술의 전수 이수 현황 | ||
역사적 특성 | 본 자원의 발생 (형성 배경 ) | 동학교주 최제우가의 여동생이 오빠가 못 다한 포교정업의 결실을 거두고자 홀로 치성지를 찾아 각지를 돌아 다니다가, 이 곳 시약산자락에서 목욕제계하고 9일간의 단식 기도 끝에 산신령이 현몽으로 가르켜 준 이 곳에 조그만 제당을 지었다 |
본 자원의 발전과정 | 원근 주민들의 숭앙을 받아 오던 최씨 여인의 입적후 지역 주민들은 자진하여 산제당을 개축하면서 ‘시약산 산제당‘이라 이름 짓고, 최제우와 부인 진양 하씨, 여동생 최씨 여인 등 세분의 영정을 함께 봉안하여 그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또한 동네의 평안함을 위한 산신제를 해마다 음력 10월 15일에 지내고 있다. | |
상업적 특성 | 자원의 활용 현황 | 없음 |
전국적인 인지도 현황 | 일부시민들만 알고 있는 상태 | |
브랜드의 형성 여부 | 없음 | |
구성요소의특성 | 최제우와 부인 진양 하씨, 여동생 최씨 여인 등 세분의 영정을 함께 봉안 | |
문화적 특성 | 구성요소의 특성 | 최제우와 부인 진양 하씨, 여동생 최씨 여인 등 세분의 영정을 함께 봉안 |
핵심 표현물(캐릭터) | 일부시민들만 알고 있는 상태 | |
문화향유자의특성 | 부산에서도 가장 오래된 제당 | |
기타 핵심적 특성 | 건물 자체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낮지만 산제당은 마을 사람들의 정서와 옛 풍속이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라 보존 가치가 충분하지만 재개발지역이라 철거 위기에 놓여 있음 |
3. 본 향토자원의 상품화, 사업화현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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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명(상호명) | ||
종업원수 | ||
연간 매출액(천원) | ||
주요 판매처 | ||
주요 홍보 및 마케팅 수단 | ||
사업관련 분야 | ||
본 향토 자원의 가치증대 가능성 및 방안 | 자원관리 분야 | |
생산기술 분야 | ||
유통판매 분야 | ||
상품화 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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