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경남출신 인물

[스크랩] 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12> 광복 70년…잊힌 독립투사들(중)박차정의 오빠들

우촌k 2015. 11. 15. 12:29

박창희 대기자의 말하는 두레박 <12> 광복 70년…잊힌 독립투사들(중)박차정의 오빠들

이국땅 독립운동도, 김원봉과의 사랑도…두 오빠가 있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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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9-22 18: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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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 복천동 박차정 의사의 생가. 박차정의 오빠인 박문희, 박문호 독립운동가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곳이다. 동래구 문화알리미 송덕숙 씨가 우물가에 앉아있다.
 
- 일제에 분개해 자결한 아버지 
- 강인한 어머니가 낳은 세 남매 
- 첫째 박문희, 의열활동하다 행불 
- 셋째 문호도 투쟁운동으로 요절 

- 넷째 박차정은 알려졌지만  
- 그녀의 항일사상 자양분 된 
- 두 오라버니 행적은 저평가 

# 우물  

동래구 복천동 319번지. 반듯한 한옥 한 채가 초가을 햇살을 받고 있다. 마당가에 우물이 하나 있다. 먹지도 쓰지도 못하는 형색뿐인 우물이지만, 한때는 집안 식구를 먹여살리던 복천(福泉)이었을 게다. 옛날엔 우물이 얼마나 소중한 생활 밑천이던가.

나, 박차정(朴次貞·1910~1944)은 이곳에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식민 치하였지만 단란한 가정이었다. 널찍한 마당에 자그마한 방이 다섯 개였다. 식솔들은 도란도란 오손도손 살았다. 부모님은 우리들이 의롭게 올곧게 살도록 가르쳤다. 내 어릴 땐 우물이 몹시 컸었다. 요즘 같은 가을날엔 우물에 파란 하늘이 두둥실 떠가곤 했다.

아, 울 아버지! 아버지는 한말 동래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와 서울의 보성전문학교를 나와 토지사업을 맡은 탁지부(度支部)의 측량기사로 일했다. 주변에서 '왜놈의 앞잡이'라고 쑥덕거렸다고 한다. 1918년 1월,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는 유서를 남기시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며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셨다. 기장의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는 집안에 독립운동가들을 여럿 두었다. '태항산 호랑이'로 불렸던 한글학자 김두봉과는 사촌,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김두전(김약수)과는 육촌 간이었다. 

학생시절 때 나는 문학소녀였다. 동래일신여학교 교지에 실린 '개구리 소래'는 나의 문학적 감수성을 깨운 습작시였다. 하지만 조국의 현실은 엄혹했다. 나는 투사가 되어야 했다.

   

#오, 오라버니들 

오늘 여기서 독립운동의 뜨거운 사연을 들추는 것은,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는 우리 오라버니들의 의열(義烈) 활동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나의 항일사상은 오빠들한테서 자양분을 얻었고, 내가 행한 독립운동의 절반은 사실상 오빠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행운아였다. 뜻있는 인사들이 숭모회를 만든 덕분에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2001년 동상이 세워졌으며, 2005년에는 생가가 복원되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커질수록 우리 오빠들의 존재감은 가려졌다. 난 요즘도 우리 오빠들이 정당하게 평가되어 신원이 되는 꿈을 꾼다. 내가 눈을 감아도 눈을 감을 수 없는데, 그런 자식을 둔 울 아버지, 어머니는 오죽하리오.

문희 오빠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한 오빠는, 6·25 전란 중에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행불도 서러운데 뚜렷한 근거도 없이 납북 혹은 월북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낙인이다. 내가 아는 문희 오빠는 항일운동과 사회주의 활동에 몸담았을 뿐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문희 오빠는 젊은 시절 한때 종교에 심취했으나 1925년부터 북풍회 등을 통해 사회운동을 전개했고,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전국을 무대로 움직였다. 1932년 3월 오빠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난징으로 건너왔다. 그때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그이는 나의 남편이다-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준비했고 오빠에게 입교생을 모으도록 요청했다. 오빠는 그해 9월 부산에 잠입해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 입교 지원자 5명을 선발해 난징으로 밀파했다. 오빠는 민족시인으로 잘 알려진 이육사, 밀양 출신의 항일투사 윤세주와도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다. 이들은 모두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들이었다. 일본 경찰은 오빠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문희 오빠는 1934년 1월 신병 치료와 2기생 모집을 위해 부산에 잠입했다가 1기 졸업생 5명이 체포됨에 따라 배후인물로 지목돼 부산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아, 문호 오빠! 불쌍한 우리 둘째 오빠!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문호 오빠는 동래누룩조합 사무원으로 일하다 1929년 사고 아닌 사고를 쳤다.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조합의 공금 1500원을 가지고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을 한 것이다. 중국에서 그는 외가의 인척인 한글학자 김두봉을 만났고, 의열단장 김원봉 등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문호 오빠는 베이징 조선공산당재건동맹과 레닌주의 정치학교 활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일본 나가사키 우라카미 형무소로 끌려가 1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일경의 고문과 수형생활 여독으로 가출옥을 했으나, 한 달 만에 다시 체포되어 이번엔 서대문형무소에서 11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두 차례의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은 오빠의 몸을 병신으로 만들었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일경은 서둘러 가석방시켰지만, 오빠는 출소 한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28세, 꽃다운 나이였다. 동래 청년단체 주도로 장례가 치러지던 날 어머니는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다가 실신했다. 


# 국내 탈출 작전
내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항일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던 나는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연대 시위투쟁인 '근우회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어 극심한 취조를 받았다. 건강이 악화되자 문희 오빠가 나서 병보석을 신청했다. 큰 오빠는 나를 중국으로 망명시키는 작전을 짰다. 내 소식을 들은 문호 오빠는 서울로 요원을 밀파해 탈출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은 일경의 기밀문서에 잘 나타나 있고, 막내 동생인 박문하(의사·수필가)가 쓴 수필 '누님 박차정'이란 글에도 소개돼 있다.

1930년 2월 22일 저녁 8시께 작전이 시작됐다. 나는 서울역에서 야간 기차를 이용해 인천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중국행 정기선을 탔다. 생각하면 아찔하고 살 떨리는 순간이었다. 잡혔다면 내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고국과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으니 그것도 운명이라 해야 할지….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 나는 문호 오빠를 만났고 외당숙 김두봉과도 상봉했다.

사랑도 혁명도 운명이던가. 1931년 3월 나는 의열단장인 김원봉과 결혼했다. 개구리 소리에도 애닯아 하던 동래의 문학소녀와 톨스토이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즐기던 김원봉은 이렇게 만나 혁명같은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이 된 나는 이듬해 2월 중국 곤륜관 전투에서 일본군이 쏜 총을 맞고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고, 해방 1년을 앞두고 생을 접었다. 해방 직후 남편은 '핏덩이가 말라붙은' 나의 속적삼을 들고 조국을 찾아 막내동생 문하에게 건넸다고 하는데, 생각할수록 그 장면이 저리다. 그뒤 김원봉은 월북했고 역사는 그를 지워나갔다.


# 잊혀지고 있는 사실  

우리 오빠들의 의용담은 2011년 2월 타계한 김재승 한국해양대 교수의 연구 덕분에 이 정도나마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오빠들의 행적은 영영 파묻힐 수도 있었다. 고 김재승 교수는 '잊혀진 항일투사 박문호의 행적과 투쟁'(부산시사편찬위원회 발간 '항도부산' 25호), '부산 출신 의열단원 박문희의 항일활동'(경성대 한국학연구소 발간 '문화전통논집' 제16집)이란 논문을 통해 의로운 삶을 살다 간 우리 오빠들의 항일투쟁 이력을 발굴해냈다. 경의를 표할뿐이다.

1260만 명이 보았다는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은 나와 우리 오빠들이 살았던 동래 '생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최 감독은 '과거의 있었던 사실이지만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생각을 붙잡고 의열단을 되살렸다고 했다.

한국 최고의 독립운동 가문으로 여섯 형제가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뛰어든 우당 이회영 집안을 꼽지만, 감히 말하지만, 우리 집도 그 못지않은 독립운동 집안이다. 일제에 분개해 자결한 아버지, 누구보다 강했던 어머니, 그 사이에서 태어난 박문희-박문호-박차정으로 이어진 독립투쟁사는 우리 집안의 이야기일뿐 아니라 부산의 이야기, 대한민국의 의용담이다.

   
후손들이여, 동래 생가에 가면 우물을 들여다 보라. 두레박을 드리워 부산을 빛내고 한국을 지킨 한 독립운동 가문을 기억해주길…. 행여 몇 년전에 제기된 기념관 건립 논의가 있게 되면 그땐 '박차정 기념관'이 아니라, '박문희-문호-차정 독립운동 기념관'으로 세워주길…. 부산 사람들이여, 우리 문희·문호 오빠를 잊지 마시길!
출처 : 진리를 추구하는 만대산
글쓴이 : 진리추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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